– 소개팅과 몰랑이 인형 [비움 일기] 1일차

 나는 주변에서 인정하는 맥시멀리스트(maximalist)다.

이 단어를 진지하게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라 사전 찾아보니 타협을 배제하고 최대한 요구하는 자, 과격주의자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단순히 물건에 대한 욕심이 많아 무진장매의 성격을 설명하는 말일 줄 알았는데 조금 당황스럽다.

과격주의자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부터 내가 쓰려고 하는 일기는 맥시멀리스트에게서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가득 찬 장롱, 위태롭게 쌓여 있는 책들, 온갖 크고 작은 인형들.만치를 한 번 치려면 먼지 폭풍이 발생하는 방을 깨끗이 비우려고 한다.

간단한 룰을 정했다.

1일 2개의 물건을 버리는 것 2. 버리는 것에 대해서 쓴다.

엄청나게 큰 가구든 볼펜 한 자국이든 하루에 꼭 두 가지를 버리고 버리기 전에 그 물건에 대해 글을 쓰도록.

가장 먼저 버리게 된 것은 대형 부지화 인형.내 방에 함께 산 지 4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 인형을 받던 날이 기억난다.

2016년 스물둘 신촌에 살았던 봄날의 기억.한가한날이었다.

저녁에는 미팅이 있어서 시험기간이라 조금 피곤했던것 같다.

두 번이나 시간을 끌고도 늦은 상대는 처음 보는 순간 머뭇거리기 시작해 헬스클럽 계약 연장에 쫓겼다는 것이다.

실패했다는 생각을 간직한 채 걷던 길거리 공기는 싸늘했다.

나는 밥을 먹고 왔다면서(빨리 집에 가려고 했다)자신이 한턱 내니까 횟집에 간다고 말한 뒤 술이 강하다고 자랑하고 1개도 먹지 못하고 혼자 취했다.

집에 갈 각오를 재면서 친언니에게 전화해 달라고 카카오톡을 보냈다.

언니와 나는 그때 함께 살고 있었다.

신촌의 식당가 위에 있는 2층짜리 하얀 집 같은 방에서.우리는 어릴 때부터 같은 방을 쓰고 때로는 함께 샤워도 하고 손을 잡고 잤다.

우연히 언니와 같은 대학에 와서 혼자 서울에서 정신없이 지내던 나에게 언니와의 생활은 위로가 되었다.

아직 이정표지만 갓 상경했을 때는 참혹한 이정표여서 언니가 학교 앞 골목으로 길을 잃은 나를 데리러 와 주었으니까.

깔깔 웃으면서 만났던 언니랑 홍대에 가봤어.여전히 흔하게 볼 수 있는 신촌의 큰 교회를 지나 달이 환히 보이는 다리를 건너 걸었는지, 택시를 탔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봄바람을 맞으면서도 둘이서 키득키득 소주를 마시고 따뜻한 계란말이를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웃음이 터져 나온 소개팅 소식을 들은 누나는 아이스크림을 사 주려고 나를 술집 옆 편의점으로 데려갔다.

케이크, 양주, 사탕, 초콜릿, 꽃다발 사이에 오도카니 놓여 있던 모르랭이 인형을 본 것도 그때였다.

원래 같은 것이랑 같은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데 조금 취해 그 앞에서 만지작거리다가 얼마 전 생일 선물 겸 소개팅으로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라며 4만원 남짓에 쿨결제를 해줬다.

그때는 이미 미팅이든 뭐든 그저 기분 좋은 술기운만 남아 있다가 문득 가슴에 안고 빙빙 돈 기억이 있다.

언니는 자기 돈을 써도 된다며 사진까지 찍어 주고 둘이서 다시 즐겁게 웃으며 신촌으로 돌아왔다.

비록 지금은 세월이 흘러 조금은 빛바랜 하얀색이 되었고, 다른 작고 귀여운 인형들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나 때문에 헤어지게 되었지만 평생 기억에 남을 몇 안되는 봄밤의 하루를 만들어준 귀엽고 소중한 인형이었다.

나를 잘 알고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나에게 인형이나 책을 선물한다.

귀여운 것에 눈이 없고, 책을 끼고 사는 책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집에 인형이 너무 많아져서 최근에는 인형 선물을 사사건건 거절하고 있었다.

아쉬운 인형이 많았지만 집이 꽉 차서 어쩔 수 없었다.

원래 나와 함께해준 인형을 조금씩 보내야 또 다른 인형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집도 공간도 마음도 그렇다.

새 것을 사려면 그에 걸맞은 공간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공간을 채우려면 채울 만한 빈 공간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새로운 마음, 새로운 사람을 가슴에 넣으려면 그만큼 내 가슴 메운 것을 내놓아야 한다.

이제는 좀 알 것 같아.